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한영 암살 사건 (문단 편집) == 소송 및 재판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53454354.jpg]]}}} || || 2004년 4월, 아내 김씨가 모 기자와[br]인터뷰를 하고 있는 모습. || '''2004-12-17 자유아시아 방송''' 재판부 판결에 만족 이씨의 부인 김 모 씨는 오늘 재판에서 국가적 책임에 대한 일부 보상 판결이 나오자 재판부의 판결에 만족한다고 말했다. >7년 10개월이라는 시간이 너무 힘든 시간이었구요, 굽이굽이 너무 힘들게 지내왔어요. 가까운 분들의 도움으로 재판을 하게 됐고 저는 대한민국 재판부가 저희 손을 들어준데 대해서는 너무나 기쁩니다. 또, 소송내용에 대해서도 판결문이 나온데 대해서도 너무나 그 부분은 만족을 하고 있어요." 김 씨는 재판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예측할 수는 없었지만 그동안 최선을 다했다고 말했다. 남편의 대북관계 공로를 인정받고 싶어했다. >이 사회를 믿고 싶었어요. 지금까지 불신하는 마음이 있었고 했지만 믿고 싶었구요. 제가 저의 심정과 살아왔던 얘기들을 판사님에게 보냈구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거든요." 김씨는 자신의 아이에게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재판에 최선을 다했다며 앞으로 대북관계에 있어 공로를 인정받아 남편이 완전한 명예회복을 할 수 있게 하겠다는 의지를 비쳤다.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생각해 줬으면 하는 생각이었구요, 인터넷 같은데 있는 이한영 씨의 자료들이 아이가 보기에는 부끄러운 부분이 없지 않아 있었기 때문에 대한민국 저희 정부가 저희한테 얘기해 주신 부분이 없기 때문에 저희는 정말 죄인 아닌 죄인의 마음으로 살았어요. 숨어서 살고 이사도 여러 번 다니구요. 그 힘든 시간들을 이 하나를 위해 보내왔구요. 차후에 일들은 의논을 해서 여러 가지 또 진행해야 할 일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파일:111111145545.jpg]] 1998년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자 국정원은 "이한영씨가 대동강 로열패밀리를 저술해 스스로 화를 자초한 것" 이라고 책임을 피했다. 이에 이한영의 미망인 김씨는 "국가에 막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국민에게 실상을 알리려 한 고인의 뜻을 왜곡하는 것" 이라고 불복하며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한편 2003년 4월 17일 김씨는 압수품가환부신청을 통해 사건 당시 총상 혈흔이 남아있는 이씨의 국방색 점퍼와 부츠, 휴대폰, 그리고 딸과 함께 찍은 사진이 담긴 이씨의 지갑, 딸이 이씨 부부에게 보낸 편지, 은행 계좌번호가 적힌 메모 등 이씨 유품 20가지를 돌려받았다. 김씨는 "이전까지 돌려받은 유품은 주민등록증 한장 뿐이었다" 며 "옷가지, 수첩, 서적 등 많은 유품의 행방을 여전히 찾지 못하고 있다" 고 말했다. 피랍탈북연대는 국가정보원 등을 상대로 나머지 유품 반환을 요구할 계획이다. 사건은 발생 11년 만인 2008년 국가로부터 손해배상을 받았다. 2008년 8월 대법원은 이 씨가 피살된 사건과 관련해 국가가 유족에게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는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은 이 씨의 아내 김씨가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9699만 원을 지급하라는 원심을 확정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씨도 국가안전기획부의 만류를 무시하고 언론 인터뷰와 TV 출연 등을 통해 노출한 책임이 있다" 며 국가 책임을 60%로 제한했다. ||'''<사안의 개요> (대법원 2008. 8. 21. 선고 2006다2346 판결)''' * 이일남은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회 위원장의 처조카(이일남의 어머니인 성혜랑의 여동생인 성혜림이 김정일의 처였다)로서, 1982. 9. 28. 스위스 제네바에서 어학연수를 받던 중, 그 곳 주재 우리나라 공관을 통하여 귀순하였다. * 이일남은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의 비공개 정착 추진 정책에 따라 이름을 ‘이한영’으로 개명하는 등 귀순 사실을 밝히지 않은 채로 국내에 정착하였고, 한양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다가, 1988. 12. 원고와 결혼하여 딸을 두고 생활하고 있었다. * 그런데 1996. 2. 13.경 조선일보를 통하여 성혜림, 성혜랑의 망명사건과 이한영에 관한 기사가 사진과 함께 보도되고, 1996. 2. 14. 동아일보 등을 통하여 이한영의 인터뷰 기사가 보도되는 등 이한영이 귀순한 김정일의 처조카라는 사실이 언론 등을 통하여 공개되었다. * 이에 이한영의 결혼으로 구 월남귀순용사특별보상법에 준하는 정착지원을 종료하였던 안기부는 신변보호차원에서 1996. 2. 15.부터 같은 해 6. 15.까지는 3차례에 걸쳐 이한영과 그 가족을 안전가옥에 수용하는 조치를 취하였으나, 그 후로는 별다른 신변보호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경찰에 이한영의 신병을 인계하지도 않았으며, 따라서 경찰에서는 이한영이 귀순자임을 알지 못하였다. * 위와 같은 와중에도 이한영은 지상파 TV에 출연하고, 북한 체제와 김정일의 호화생활 등을 비판하는 내용의 ‘대동강 로열패밀리 서울 잠행 14년’이라는 수기를 출판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 1997. 2. 12.경 북한 노동당 비서 황장엽이 망명을 요청한 이후 북한이 관영 중앙통신 등을 통해 ‘보복’ 등의 용어를 사용하며 한국 측을 비방해 오던 중, 이한영은 같은 달 15. 집 앞에서 괴한으로부터 머리와 가슴을 피격당하는 사고를 당하였고, 인근 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다가 같은 해 2. 25. 사망하였다. * 그 뒤 수사기관의 수사결과 1997. 2. 말경 ① ‘○○금융 심부름센터’의 소장이 1997. 1. 31.경 성명불상자로부터‘1993년도에 서울구치소에 수인번호 1421번으로 수감되었던 이한영’이라는 사람의 주소를 알아달라는 의뢰를 받고, 서울구치소 명적과를 통하여 이한영의 주민등록 앞번호와 수감 당시 주소를 알아낸 후, 이를 바탕으로 당시 서울경찰청 정보과 경사였던 조○○으로부터 현 주소지의 집 주소를 알아내어, 위 의뢰자에게 그 주소를 알려준 사실, ② 성명불상자가 1997. 2. 5.경 ‘○○용역 심부름센터’를 통하여 이한영의 주민등록번호와 집주소를 대고 집 전화번호 등을 알아낸 사실 등이 밝혀졌고, 당시 신문 등을 통하여 위와 같은 사실이 보도되었다.|| [[파일:21123.jpg]] > ''후기'' >'''⚫이 사회의 작은 '주연' 을 꿈꾸며''' > >최은희·신상옥 부부가 북한을 탈출했을 때, 관계당국의 한 인사는 "그들이 쇼를 하는 것 같지는 않은가?" 하면서 내 의견을 물었다. 별장까지 제공하고 최고급 벤츠를 주는 등 국빈에 준하는 대우를 해주었는데, 북한을 탈출할 이유가 뭐겠느냐는 질문이었다. 나는 명확하게 대답했다. "그들의 탈출은 진실된 행동이다. 나는 그들의 행동을 이해한다." 드라이브할 데도 없는 울타리 안에서 벤츠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누군가를 불러 밥이라도 한끼 먹거나 터놓고 얘기할 사람도 없는데, 호화 별장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예쁘고 날씬한 여자가 화려한 수영복을 입고 울타리가 쳐 있는, 아무도 없는 백사장에 혼자 누워 잇으면 행복할까? 누군가 쳐다봐주는 사람이 있어야, 과시할 데가 있어야 작은 흐뭇함이라도 느낄 수 잇지 않을까? 최은희·신상옥의 경우 김정일이 크게 착각했다. 최고급 자동차와 호화 별장에 달러면 주면 자기 곁을 떠나지 않을 것으로 잘못 생각했다. 돈도 쓸 데가 있어야 돈이다. 쓰고 싶은 환경도 필요하다. 백화점에서 비싼 옷과 물건을 사는 이유는 무인도에 혼자 입고 가기 위해서가 아니다. 거리에서 또는 호텔이나 레스토랑에서 멋부린 내 모습을 남이 보아주었으면 하는 심리 때문이다. 무인도에 가서 혼자 살아야 할 경우라면 남대문시장이나 동평화시장에 가서 질기고 튼튼한 옷을 고를 것이다. 더구나 최은희·신상옥 부부는 반세기 동안을 자본주의사회에서 자유분방하게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그것도 주연배우로서 산 시간이었다. 그러나 북한에서의 8년 세월은 김정일이라는 주연을 위한 조연의 생활일 뿐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탈출은 충분히 이해가 가고도 남았다. > >나도 평양에서 조연이었다. >주연인 김정일 김정남이 언제나 부러웠다. >주연배우가 되는 꿈을 꾸곤 했다. >모스크바에서는 내가 자주 주연이었다. >대사관 직원들 앞에서, 그리고 내 외국인 친구들 앞에서는 항상 주연이었다. >그러나 평양에서 호출하는 순간부터 나는 조연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언제나 주연이고 싶은 내 욕망이 실현될 것 같았다. >여기서는 다소의 수입만 있으면 얼마든지 주연일 수 있다. >여기서는 수많은 주연들이 살아가고 있다. >북한은 다르다. >김정일 김정남 주연에 몇몇 당간부들은 조연이고, 인민들은 단역이다. > >지난 번 어머니와의 통화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지금은 부도 나서 힘들지만 거기(북한) 가서 살고 싶은 생각은 절대로 없어요." > >'''여기(남한)에서의 삶의 주체는 나 자신이다.''' > >'''적당히 여유로운 삶 속에서 나는 작은 주연으로 살아갈 수 있다.''' > >'''무수한 주연들이 살아가는 사회, 이것이 자유 민주주의 사회가 아닌가 싶다.''' > >'''그러나 북한은 하나의 거대한 우상(주연)을 위한 단역들의 집단이다.''' > >나는 여기 와서 사업도 크게 해보았고, 돈도 많이 벌어보았다. 김정일 부럽지 않은 주연의 삶도 누렸다. 그러나 나는 주연의 자리를 지키는 데는 실패했다. 주연으로서의 자기관리와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나는 한때 자유를 방종으로 착각했던 것 같다. 자유란 어느 정도의 절제와 질서 안에서 지켜진다는 것을 몰랐던 것 같다. 14년이란 긴 터널을 빠져나온 지금에야 비로소 이 땅에서 주연으로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요소들을 깨달은 것 같다. 사업 실패와 감옥, 이런것들이 내가 이 사회의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아가기 위한 수능시험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길고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온 나는 지금 새롭게 인생을 출발하고 있다. 평양에서 꿈꾸어왔던 허황된 주연이 아니라 내 삶 속에서 작은 주연이 되기 위해, 그리고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새로운 노력을 시작하고 있다. >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에는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다. 맨먼저 공정한 판결로 나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주고 새로운 삶의 희망을 안겨주신 당시 재판장 이범주 서울고등법원 형사5부 부장판사(현재 서울고등법원 민사7부 부장판사)께 이 지면을 빌어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린다. 이 부장판사님의 판결이 없었다면, 나의 새 출발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끊임없는 기도로써 나에게 빛과 희망을 주신 한생명교회의 김준모 목사님과 남상화 집사를 비롯한 많은 교인들께 이 기회를 통하여 감사를 드린다. 또한 내가 이 땅에 뿌리 내릴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시고 많은 도움을 주신 (주)동산의 홍길봉 사장님과 김장현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분들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귀순 때부터 나를 돌보아주신 관계당국의 여러분들에 대한 감사의 인사도 빠뜨릴 수 없다. 나의 작은 기록을 책으로 낼 수 있도록 격려해주시고 기회를 주신 동아일보 김병관 회장님과 정구종 출판국장님께 깊이 감사드린다. 끝으로 이 책이 나올 때까지 고생해주신 동아일보 김대곤 편집위원과 출판국 관계자 여러분들께도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 >대동강 로열패밀리 서울잠행 14년 - 후기 (371-374P)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